미국인이 그린 이순신 만화가 있다. 다만, 성인용이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니, 유혈이 낭자할 뿐 아니라, 선정적인 장면도 많다.
그런데 이 ‘어른을 위한’ 이순신 만화를 지키기 위해 국내 팬들이 발 벗고 나섰다.
◆ 중단 위기 팬들이 막아…“이순신, 전세계에 알릴 것”
미국 시카고 출신의 만화가 온리 콤판(Onrie Kompan, 32)은 2009년부터 『이순신 : 전사와 수호자(YI SOON SHIN : Warrior and Defender)』라는 시리즈를 연재하며 전 세계에서 ‘영웅’ 이순신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총 12권을 목표로 7권까지 완성한 그는 지난해 중단 위기를 맞았다. 후원자의 사정으로 재정지원이 중단된 것이다. 게다가 준비해오던 한국어판 출판마저 무산위기에 놓였다. 급했던 작가는 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셜 크라우드펀딩(후원금 모금) 사이트에 자신이 제작하고 있는 작품을 소개하고 현재 처한 어려움을 설명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미국(https://goo.gl/2t5lM6)과 한국(https://goo.gl/ghRlsH)에서 동시에 진행된 캠페인은 한 달이 채 안 돼서 목표했던 금액을 돌파했다.
특히 한국 팬들의 지원은 적극적이었다. 참여 인원과 모금액 모두 미국의 캠페인보다 두 배의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달 24일 시작된 캠페인은 어제(27일)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5,600여 달러(약 600만 원)와 1,370만 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다.
한국인들의 뜨거운 반응에 작가는 “5개월 전 어려움이 겹쳤을 때, 이순신 이야기를 포기하려 했다”며 “이렇게 한국 팬들의 도움으로 다시 새 힘을 얻게 된 만큼, 이순신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쓰겠다”는 인사를 전했다.
◆ 이순신에 미쳐 10년…“그는 세계적 영웅”
이 미국인 작가는 어떻게 이순신을 알게 됐을까. 18세까지 태권도를 배워 한국 문화에 익숙했다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태권도는 그만뒀지만, 관심은 온통 한국과 만화 두 가지뿐”이었다고 했다.
그런 콤판에게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콤판은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며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했다.
이순신에 빠진 그는 공부에 들어갔다. 난중일기와 징비록 등을 영문판으로 찾아봤고, 한국의 역사학자와 교수를 찾아 자문을 얻었다. 콤판의 열정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순신연구소장을 역임한 정병웅 순천향대 교수는 “만화 제작을 위한 자료 수집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의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며 “미국에서도 수시로 이메일로 연락하며 자문하고 있다”고 했다. 정 교수는 그의 열정과 이순신에 대한 애정을 높이 평가했다.
역사 블로그를 운영하는 ‘번동아제’의 글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008년 ‘이순신 만화에 꿈을 건 미국인 C씨와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콤판과의 만남이 소개된다. 콤판은 수차례에 걸쳐 드라마 속 임진왜란과 실제의 차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 “국내 출판 무리” vs “전쟁의 실상을 말한 것”
작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그린 이순신 이야기는 북미 지역에서 4만 부가 넘게 팔렸고, 올해 안으로 5만 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
스탠 리 마블 코믹스 명예회장은 “이순신의 용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며 “(온리 콤판이)한국 역사에 대한 열정과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동적인 대서사시를 엮어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 출판계의 시선은 달랐다. 국내 출간이 무산된 것은 ‘성인용’ 이순신 만화는 한국 시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출판사의 판단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17세 이상만 볼 수 있는 콤판의 작품에는 잔인한 전투장면과 일본 장수끼리의 동성애, 또 왜군이 조선의 여인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내용 등의 장면이 있다.
백원기 한국출판학회 연구이사는 “국내 정서상 자칫 이순신 장군이나 임진왜란에 대한 묘사가 잘못될 경우 논란이 커질 수 있다”며 “일부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장면 수정 없이는 국내 출판에 위험부담이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작가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콤판은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죄 없는 조선인이 유린당했다”며 “왜군으로부터 민족을 지켜낸 이순신 장군을 설명하기 데 필요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정이 알려지자 몇몇 국내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다. 콤판은 “10곳이 넘는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은 만큼, 이순신 시리즈 완간과 함께 한국어판 출판도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