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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박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의문사.jpg
짤박스 2015-07-02 15:08:09 | 조회: 2145

 

 

 

장준하 ‘실족사’ 끝나지 않은 의혹
경사 75도, 높이 14m 암반서 굴러떨어졌다는데 외상없고
최후 본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 사고 뒤 갑자기 교사로 취직..의문사위선 “규명불능” 발표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에는 입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던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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